책 리뷰 : 아직도 가야할 길 _ 스캇 펙
스캇 펙의 출판 이력은 그의 진화를 반영한다. 그는 작가에서 사상가,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영적 안내자로 진화했다. 하버드대학과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에서 수학한 후, 10여 년간 육군의관(정신과 의사)으로 일했다. 이때의 경험은 후에 개인과 조직에서의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그러한 통찰은 여러 편의 책에서 구체화된다.
1978년, 마흔 두 살에 쓴 첫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사랑, 전통적 가치, 영적 성장에 대한 새로운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심리학과 영성을 매우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중요한 책’으로 평가되며 이후 《뉴욕타임스》의 최장기 베스트셀러 목록을 차지할 정도로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불교도로서 이 책을 집필한 이후, 저자는 공개적으로 크리스천으로의 개종을 선언하고 인간 심리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지향하는 글쓰기에 매진한다. 개인뿐 아니라 조직과 사회의 영적 성장을 꿈꾸었던 스캇 펙은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비영리 교육기관인 공동체장려재단(FCE)을 만들어 평화적인 동력을 구현해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의지와 나름의 해법은 《마음을 어떻게 비울 것인가》(1987)에 고스란히 담겼다. 일생동안 ‘자기 훈육’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 때문에 진정한 자기계발서 장르를 구축한 저자라고 평가받는 스캇 펙은 2005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다룬 주제를 더 발전시킨 강연 모음집 《끝나지 않은 여행》(1993), 첫 출간 이후 20여 년간 더 깊어진 통찰과 통합적 시각을 보여주는 《그리고 저 너머에》(1997) 등이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무엇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책이었기에 성공했고 독자들이 그 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 책은 완전하지 않으며 작가는 전적으로 그 결함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 책이 필요했다는 이유 때문에 좁은 사무실에서 고독하게 책을 쓰면서도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절 의심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도움에 대해서 설명할 도리가 없지만 그러한 체험이 작가에게만 일어난 일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실, 그런 도움이 이 책의 궁극적인 주제다.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환자를 치료하면서 얻은 것이다. 화자가 자신과 씨름하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어떻게 성숙해 가는지, 그런 씨름에 실패한 환자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관찰하면서 얻은 기록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많은 실제 사례들로 이루어졌다. 사례의 설명이 간결해지면서 다소 왜곡된 부분이 생겼을 수도 있다. 나아가 심리 치료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과정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사례별 중요한 부분에 초점을 두어 설명하다 보니 독자들은 심리 치료가 드라마틱하고 명쾌한 과정이라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드라마는 실제로 일어난 것이고 끝에 가서야 모든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다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부분의 치료 과정에 동반되는 장기간의 혼란과 좌절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해 기술할 때 어떠한 편견을 두고 기술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영혼과 정신의 성숙 과정’이란 복잡하고 험난할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평생의 일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영적 성장에 이르는 길은 머나먼 길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힘들다는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며 살아간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는 훈육이다. 온전한 훈육이 있어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오로지 문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자녀들에게 정신적,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법을 늘 가르쳐야한다. 훈육이 필요하다. 괴로움을 감당하게 하며 문제로 인한 고통을 건설적으로 겪게 한다. 훈육에는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기, 책임지기, 진리에 대한 헌신, 균형 잡기 이렇게 4가지가 있다.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다.
즐거움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삶이 주는 고통과 즐거움을 맞보는 순서를 정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먼저 고통을 맞고 겪고 극복함으로써 즐거움은 배가된다. 이것이 품위 있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서는 즐거움을 뒤로 미루지 못하는 것이 성인의 삶에 끼치는 더욱 미묘하면서도 매우 파괴적인 것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지적·사회적·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파괴적인 결함을 행동해서는 안 된다.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이를 피하게 마련이다.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을 때만이 지도를 수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절제력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에 전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진실에 헌신하는 삶이란 무엇보다도 그것은 지속적으로 쉼 없이 철저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의미한다.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진실에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점점 더 자기 성찰의 길로 나아간다. 또한 진실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생활이란 자진해서 다가오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생활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요구사항, 즉 자신을 포기하고 생명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인데, 하느님이나 운명이 강요하는 가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자신을 포기함으로 인간 존재는 가장 황홀하고, 영구적이고, 확고하며 무한한 인생의 기쁨을 발견한다.
훈육을 뒷받침하는 것, 훈육할 원동력을 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신비롭다. 사랑에도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 등으로 나눈다. 작가는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사랑의 정의에는 첫째, 그것이 목적론적인 정의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목표에는 영적 성장을 목표로 한다. 둘째로는 작가가 정의한 사랑이 신기한 순환적 과정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셋째로 사랑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정의는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넷째로 자기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지’라는 단어로 욕망과 행동을 구분한다. 사랑하려는 욕구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의 행동이며, 다시 말해서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다.
인간이면 누구나 어떠한 세계관을 갖고 있으므로 누구나 종교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종교란 반드시 신을 섬겨야 하며 어떤 의식이나 예배 집단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의 세계관은 저마다 다르다. 세계관은 항상 문제의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치료사는 근본적으로 이를 알아야 하고 치료를 위해선 필수적으로 그들의 세계관부터 교정해야 한다. 종교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람들의 문화이기 때문에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의 가족을 잘 알아야한다. 성장 발달에 가장 기본이 되는 문화는 가족 문화이고, 부모는 그 문화의 지도자 인 것이다. 더욱이 가족 문화의 영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말해준 신과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세계다.
은총은 인간의 의식 세계 바깥에서 생겨나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돕는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힘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인간의 의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 뿐, 즉 그것이 없는 곳이 어디인지만 알 뿐이다.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일견 단순해 보이는 관념은 결코 안이한 철학이 아니다. 사랑을 베푸는 하느님이란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다 보면 결국 한 가지 무서운 결론에 이른다.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믿는 즉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한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을 시도할 의무를 지운다. 하느님이 자신처럼 성장하도록 인간을 적극적으로 양육한다는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게으름에 직면하게 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영적인 것을 중요시 여긴 사람인 것 같다. 이 책을 쓸 당시에는 불교 신자였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분명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나, 이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앞으로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될 터인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기독교교육을 배우고 있는 학생으로서, 요즘 참 고민이 되는 것은, 교육은 과연 누가 교육하는 것이 가장 참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분명 참 선생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과연 누가 바로 좋은 교사가 될 것인가? 학교에서 아무리 선생님과 친구들과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하고 무언가를 배워간다고 하더라도, 가정에서 학교에서와는 또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부모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며 마주하는가?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선생님 되심을 깊이 묵상하고 예수님처럼 교육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에게 흘러들어, 아이에게 그 사랑이 흘러가게 된다면…. 그 아이는 학교에서 원만한 생활을 하게 될 것 같다. 아마 원만하지 못한 학교생활이더라도, 참 신앙의 본을 보여준 부모,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 세상을 진정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고민을 부모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찾아간다면…그 부모가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간다면…이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부모의 사랑을 충만히 받지 못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에 대한 고민도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교수님들께도 이 문제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었다. 답은 공동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정 아이들에게 하나님 사랑에 힘입어 섬기고 봉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 어떤 삶인지 알려주고 싶은데, 이것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에 대해서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삶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진정 하나님 사랑에 우리에게 흐른다면 그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해 흐를 수밖에 없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흘러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봉사하며 살아하는 것이, 사랑하고,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떤 삶인지, 또 우리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확신이 들도록 아이들의 마음에 새길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이 진정 바르게 흘러가는 것,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우리의 삶을 얼마나 하나님께 의지하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붙들며 나아 가냐는 것이다. 아아…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셨으면 좋겠다. 점점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되어져가고, 나 자신의 말이 곧 진리가 되어버리는 이 상대주의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돈이 최고라며 돈에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이 시대를 바라보며 과연 통회하고 애통해하며 상한 가난한 마음을 붙들며 기도하는 한 사람이 필요함을 느낀다. 진정 우리의 삶은 사랑이라는 것을…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이것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들며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왜 말씀과 불일치할 수밖에 없는가? 이렇게 해서 신앙의 회의를 느끼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상황이 너무나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말씀과 삶이 일치된다는 것.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정 하나님을 믿는 그 바른 길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해보게 된다. 작가는 인간 심리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지향하는 글쓰기에 매진했다고 하며, 또 나아가 공동체의 영적 성장 또한 꿈 꿔, 단체를 만들었다는데, 작가도 나와같은 고민을 했을까, 작가가 살아있다면, 그와 대화하고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